240815 새순청년회 수련회: 에베소서 2:11-22 "교제로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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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을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11-22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2:11–22 NKRV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랑하는 새순교회 청년회 여러분. 반갑습니다. 뜨거운 여름날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수련회로 함께 모여 교제하게 되니 참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불러주시고 또 우리가 교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볼 수 있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비록 1년에 한번, 하루 밖에 안되는 수련회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는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교제’입니다. 우리에게 교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이 많아서 기존의 수련회는 말씀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수련회는 ‘교제’를 중심으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교제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이 교제를 통해 우리 공동체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루시는지를 듣고 그 말씀에 힘입어 교제하는 시간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이든,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공동체이든 행해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제입니다. 가족끼리의 교제, 친구끼리의 교제, 연인과의 교제 등 다양한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교회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교제를 누립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카페에 가서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고, 오늘처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의 교제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들의 교제와 다르지 않아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교제는 근본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의 교제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의 교제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으면 “그래요. 하나님을 믿으니 그리스도 중심이겠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의미를 알 때 우리가 교제를 대하는 태도나 마음이 달라질 겁니다. 이번 수련회 주제 말씀이기도 한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번 수련회에서 우리가 함께 교제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바울은 방대한 양의 편지를 각 교회에게 보냈습니다. 신약성경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27권인데요. 그 중 절반인 13권이 바로 바울이 보낸 편지인 바울 서신입니다. 바울이 보낸 편지들에는 일관되게 큰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바울은 먼저 복음을 이야기한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교회가 복음을 알지 못해서 바울이 복음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아니요. 오히려 그 반대일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복음을 받은 자들이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바울이 우리 교회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복음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왜 바울은 이미 복음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먼저 이야기한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 내에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학 해결책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즉 에베소서에서도 에베소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있었던 분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사이, 그리고 이들이 교제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부터 이야기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2장 1-10절입니다. 본래 우리는 2장 2절에서 말하듯이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 속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자신의 말씀을 따르고, 자신과 교제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제일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이 되려고 했던 그 아담의 마음을 닮아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어져 이전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행복하고 즐거웠다면, 이제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싫은 것이 되어버렸고, 아니 더 나아가 이제 하나님을 아예 찾지도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로 오염되어버렸고, 모든 인간에게 정해진 결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 즉 지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대로 가만히 내러벼두어도 그분의 의에 손상이 가지 않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2장 4절부터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2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고 죄로 인해 깨어졌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공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 행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과 마귀와 육체로부터 떠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이것을 말한 뒤에 이것을 토대로 성도와의 관계, 특히 에베소 교회 내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하셨다면, 이제 바울은 성도와 성도의 관계인 수평적 관계를 회복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성도와의 관계인 수직적 관계까지 영향을 준다는 건데요. 그 내용이 아까 우리 읽은 본문입니다.
바울은 11절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을 겨냥하여 교회 내에 있는 이방인들과 특별한 사회 조직, 삶의 방식, 그리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가진 유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적 긴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긴장이 매우 심각한 것은, 거기에 단순히 사회적 긴장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긴장이 또한 이방인들이 12절에서 말하듯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산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이방인 독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하셨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13절에서 말하듯이 하나님과 멀리있던 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그리고 서로를 향해 가까워지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와 성도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치셨는지 첫 번째 단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서로 분리된 인간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에게 “화평”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앞에서는 이방인을 겨냥하였다면, 이제 바울은 유대인도 같이 겨냥합니다. 11절에서 바울은 “너희 이방인들”이라며 자신의 편지들을 읽는 독자들을 분리된 집단으로 말하다가 14절부터는 “우리”라는 호칭을 쓰면서 유대인인 자신도 이 에베소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포함시키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을 둘러싸고 그들을 이방이들로부터 분리시킨 막힌 담인 모세의 율법을 허무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읽을 때 우리는 율법이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올 겁니다. 바울이 지금 율법을 말하는 뉘앙스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율법은 선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율법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율법을 사용하는 우리 인간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인간에게 주셨지만, 죄인인 인간의 손에서 이 율법은 적대감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정죄하고 상대방보다 내가 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바울은 꼬집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것을 폐기시키셨을 때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서 한 새 사람, 분리되지 않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또한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을 대항하는 적대감의 수단으로 사용했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하게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성도와 성도 간의 관계, 특히 에베소서의 수신자인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관계를 화평하게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서로 간의 관계를 14절에서 “둘”,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우리 옆에 있는 성도 간의 관계는 이런 관계였습니다. 심지어 여기 부부이신 분들도 계시는데, 서로가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했지만, 본래 부부 사이도 이런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 모든 사이를 화평하게 만드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아시다시피 이미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공동체로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도 공동체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시고, 하와를 주심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완전히 다른 공동체로서의 성격으로 변합니다. 바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공동체로 변하게 됩니다. 여전히 공동체이긴 합니다. 그러나 각자가 고립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마치 독서실에 가면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지 않습니까? 서로의 공부와 독서에 방해되지 않고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가 있습니다. 그거처럼 하나의 독서실 안에는 있으나 각자가 고립되어 있는 공동체가 바로 아담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자신에게로 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담의 공동체는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립입니다. 오로지 “나”만 있는 공동체가 아담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에 있지만 고독을 느낍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고, 내 편이 있으면 좋겠다는 갈망이 있지만 모두가 타인에게 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외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존하려는 본성을 지녔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와줬으면 좋겠지 내가 타인에게로 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모든 인류에게 내재되어 있는 성향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는데요. 여전히 세상이 전쟁하는 이유는 타인이 나에게 맞춰줬으면 좋겠는데. 상대방이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뜻대로 안 해주기 때문에 전쟁을 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이유 때문 아닙니까? 죄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은 공동체 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이 아담의 공동체는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세상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가정, 회사, 동창회, 동호회, 동아리, 사회복지단체 등등 공동체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합니다. 각자 나름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을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서 끝없이 자주 분리됩니다. 그 안에서 고독감을 우리는 느낍니다.
더 나아가 타인을 자신을 위해서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바로 나봇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을 아합이 통치할 때였습니다. 그때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곳이 아합의 궁전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아합은 이 나봇의 포도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궁전과 가까운 이 포도원을 자신에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그보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거나 그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나봇은 이 포도원은 자신의 조상의 유산이기에 여호와께서 금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나봇의 말을 들은 아합은 근심하며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보게 된 왕비인 이세벨은 무슨 일인지 묻고 아합은 나봇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근심하는 아합의 근심을 해결해주고자 권모술수를 써서 이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거짓을 퍼뜨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봇이 죽게 만들고 그 포도원을 아합이 차지하게 너무나도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셔서 이 악한 일을 저지른 아합의 죄를 지적하시고 저주를 내리십니다. 이 아합은 자신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이 나봇을 희생시켰습니다. 이 아합의 예시가 극단적일 수는 있으나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항상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려는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공동체는 항상 타인을 희생시키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보십시오. 범죄한 후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 나타나셨을 때 아담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이실직고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와가 죄를 짓게 만들었다면서 하와를 희생시키고, 심지어 하나님께 책임을 물어 하나님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아담의 공동체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아담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았는데, 자신 스스로 이 아담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담의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철저하게 죄로부터 분리되어 죄인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십니다. 특히 그분은 항상 성부와 성령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로 계시고 하나님은 삼위 안에서 항상 고립이 아니라 연합되어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아담의 공동체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이 아담의 공동체를 파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아담의 공동체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파괴된 아담의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이끌어내어 자신의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시고 우리를 자신 안에서 연합되게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서로를 고립시키는 아담의 공동체로부터 분리시키시고 자신 안에 연합하게 만드셨습니다. 또한 그분이 연합하게 만드시는 방식은 타인을 희생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희생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3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안에”, 영어로는 “in”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연합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공동체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서로가 고립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화목하고 화평한 공동체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라고 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셨고, 다음으로는 우리를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바울은 이제 세 번째로 나아갑니다. 바로 건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말합니다. 19절부터 20절 상반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바로 우리는 이제 교회 밖에 있는 아담의 공동체에 소속된 자가 아니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시민이며 여기서는 권속으로 번역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하나님의 집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건축물 구조를 하나씩 맡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려면 모퉁잇돌, 즉 건물의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건물의 기초가 되는 모퉁잇돌이 그리스도가 친히 되셨음을 바울은 말합니다. 건물의 기초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한 사건으로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공동체 건물은 그리스도께서 기초로 계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공동체에서 사라진다면 건물인 우리는 강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와르륵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심으로 우리를 지금도 연결하고 계십니다.
아담의 공동체에는 오직 “나”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너”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라는 우회하는 길을 통하여 “나” 밖에 보이지 않았던 우리가 이제는 “너”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인을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목표를 지향만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건 굳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일입니다. 동창회는 졸업생이라는 하나의 조건 또는 동창 친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모입니다. 회사는 돈을 벌고 경제 생활을 하기 위한 하나의 목표로 모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의 정신적 이상을 가지고 모인 공동체 그 이상입니다. 불교는 자신을 비워 열반에 이르고 미륵이 되는 하나의 정신적 이상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심지어 이것은 악한 것으로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마약을 통해 극단의 쾌락을 경험하기 위해 모일 수도 있으며, 사탄을 섬기기 위해 사람들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자기중심성을 지니고 있기에 고립되어 있는 공동체입니다. 언젠가 와해될 수 있으며 파괴될 수밖에 없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하나의 목표, 하나의 정신적 이상을 가지고 모인 그 이상으로 서소를 고립시키는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그분 안에서 진정으로 연합시키는 공동체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공동체를 창조하셨다는 이러한 계시를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입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외에는 고립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본질과 함께 필요성이 설정되는 공동체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동체 밖에 없습니다. 모든 공동체는 오직 “나”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너”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는 건물의 모퉁잇돌과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교회 안에 완전히 충만합니다. 그분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그분은 우리를 자신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만드시기 위해 아담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셨지만, 그분은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신 분이시라는 겁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죄를 입으신 것이지, 본질상 죄인은 아니십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 들은 것처럼 그분과 우리는 맞바꿈이 된 것이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처럼 죄인은 아니십니다.
그분은 죄인은 아니시지만, 우리와 맞바꾸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초가 됩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제의 기초도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이 말한 것처럼 구약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지만, 율법을 손에 쥔 이스라엘은 그것을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그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정죄하는 것으로 바꼈습니다. 율법은 오용하는 사람에게 진노의 힘으로 변화하였고, 공동체 안에서 이 율법으로 서로를 정죄하니 치명적인 균열을 가져와 인간을 완전히 고립시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으로 자신이 직접 들어가심으로써 이 이스라엘과 같은 위치로서의 관계에 있음을 알리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사랑을 통해 율법을 성취하셨으며, 이로써 유대인들의 율법 이해를 극복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오직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자들만이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다면,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공동체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된 공동체임을 알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기는커녕 아담과 동일한 인류에 속해 잇으며, 하나님과 화해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공동체로 재창조되어야 하는 공동체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서로를 고립시키는 이러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자신이 고립되셨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삼위 하나님이라는 연합 속에 계신 분이시지만, 아담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셔서 고립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모든 제자가 그분을 버렸을 때,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심지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도 고립이 되심으로 완전히 혼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율법에 복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감당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선사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의 건물이 되었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이 되어간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교회 밖의 교제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그리스도께서 이어주신 교제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사이를 이어주고 계십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오직 “나”만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전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를 세우신 “과거의 일”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연결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지금도 이 자리에 현존하셔서 서로의 손을 이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어주신 형제에게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어주신 것은 그리스도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 그리고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고독하게 만드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새순 청년 여러분. 우리가 이제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재밌게 놀고 함께 유익한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께서 이어주고 계시는 공동체라는 겁니다. 건물의 기초이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가 없는 교제는 허망한 것이며 고립될 수밖에 없는 교제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너”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제할 때 현존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나 중심의 교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너가 중심이 된 교제를 나누게 될 겁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상대방을 위한 교제를 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결국 “나”를 위한 공동체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섬기는 것은 결국 내가 유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우리가 비록 오늘 하루라는 짧은 시간을 가지겠지만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이번 청년회 수련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교제를 통해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로 세워져가는 우리 새순교회 청년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들은 말씀을 가지고 한번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새순 청년 여러분.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 아담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던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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